왕가의 무덤에도 있는 애증극! 세계유산~타마우돈(玉陵)
오키나와, 그 안에서도 나하시의 단골 관광지라 하면 슈리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안에서 슈리성에서 걸어서 4분으로 세계유산인 타마우돈까지 발을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요..? 그건 정말로 안타깝다고 봅니다.
입장료는 딱 300엔으로, 1501년 건립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류큐와 오키나와의 드라마.
왕가의 능묘에 숨겨진 애증극을 모르고서는 슈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음 오키나와 여행에서는 한번쯤 꼭 들러보시는 건 어떨가요?
제2차 쇼시(第二尚氏), 왕위를 둘러싼 애증극
잠깐만 류큐역사의 복습을 하겠습니다.
오키나와에도 군웅할거(群雄割拠)시대가 있어, 추잔(中山)왕이었던 쇼하시(尚巴志)에 의해 통일된 것은 1429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1470년, 중신(重臣)이었던 카네마루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라 쇼엔(尚円)이라 칭하고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이었습니다. 여기서 쇼하시(尚巴志) 왕통을 제1차 쇼시, 쇼엔(尚円) 이후의 왕통을 제2차 쇼시라 불립니다. 쇼엔이 1477년에 사망하고 그 아들인 쇼센이(尚宣威)가 즉위했지만, 반년도 안되서 실각. 그 대신 쇼센이의 배다른 형제인 쇼신(尚真/첩이었던 오기야카-オギヤカ의 아들)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합니다. 이 쇼신왕이, 아버지인 쇼엔왕의 유골을 이장하기 위해 지은 것이 타마우돈(玉陵)입니다.
단 반년만에 실각한 형을 대신해, 불과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동생. 이 이복 형제에 의한 교체극에는 대비 오기야카의 권력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타마우돈(玉陵) 중문의 왼쪽에 있는 ‘타마우돈(玉陵)비’입니다.
비문(碑文)에는 타마우돈에 묻힐 만한 인물로서, 쇼신왕 외에 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만일 이 글자를 거스른다면 「하늘을 보며 땅에 누워 벌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8명 중에는 실각한 쇼센이와 쇼센이의 딸로 쇼신왕의 정실이었던 쿄진(居仁)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다른 오기야카의 피를 이어받은 자만 포함. 왕가의 권력 싸움과 애증극이 비문의 글 안에서 전해집니다.
타마우돈을 둘러싼 수수께끼
제2차 쇼시를 이뤄낸 쇼엔과 그 피를 이은 사람 이외는, 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라는 집념을 보여주는 오기야카이지만, 타마우돈에는 오기야카의 것이라고 확실히 알려주는 지시가미(厨子甕/류큐・오키나와의 뼈단지)가 실제로는 없다고 합니다.
보통, 지시가미에는 누구의 유골이 들어 있는지를 명기하는 ‘명서(銘書き)’가 있기 때문에, 묻혀져 있는 게 누군지 특정할 수 있지만, ‘오기야카입니다’라 쓰여져 있는 지시가미가 타마우돈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쇼엔왕의 출신지인 이세나(伊是名)섬에는 쇼엔왕의 부모형제가 묻혀져 있는 ‘이세나 타마우돈(伊是名玉陵)’이 있지만, 그 곳에 있는 지시가미 중 하나가 아무래도 오기야카가 아닌가 하는 설이 있습니다.
쇼신왕은 다양한 업적을 남긴 명군으로, 그 업적 중 하나가 순사(殉死)폐지입니다.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사망하면 그 밑의 하인과 아이 없는 부인은 같이 목숨을 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쇼신왕은 오기야카가 세상을 뜨자 “지금까지와 같이 순사할 필요는 없다”라 명하며, 시녀와 가신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어머니를 경애하는 아버지와는 따로 장례를 한 것이 쇼신왕이었다면, 여기에도 부모와 자식의 복잡한 감정이 보일 듯 말듯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타마우돈에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건 ‘누구인지 모르는 수수께끼의 지시가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충신인 무쿠타 우후투치(木田大時)가 사후에도 왕족을 지킨다?!
류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유해를 몇년간 두고 있다가, 피부 등을 제거한 유골을 씻고 지시가미에 담는다고 하는 풍장(風葬)부터 세골(洗骨)・개장(改葬)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현재는 화장을 주로 하며, 세골은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타마우돈에서도 정가운데의 문 안은 유해를 보관하는 장소였습니다. 이 중실(中室) 안에서는 누구 것인지 모르는 수수께끼의 지시가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고 합니다. 국왕, 왕비, 왕족의 지시가미는 동실(東室)와 서실(西室)로 나뉘어져 놓기 때문에, 유해 놓는 장소인 중실에 하나 뿐인 지시가미가 있는 것은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지시가미는 쇼신왕에게 충의를 다한 ‘무쿠타 우후투치(木田大時)’가 아닐까 합니다. 사후에서도 쇠퇴해가는 왕족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무리 충신이라도 너무 충의를 다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옛 슈리성의 모습을 배우다
타마우돈에서는 슈리성의 의외인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슈리성은 화재 등으로 소실되고, 몇 번이고는 재건되고 있었습니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적기와에 옻칠한 슈리성은 1712년 즈음에 지어진 것을 모델로 하였지만, 그 전에는 거무스름한 고려 기와였으며, 1671년보다 더욱 이전은 판자 지붕이었던 것으로 구분되어 집니다. 타마우돈이 만들어진 것은 1501년으로, 그 무렵 판자 지붕의 슈리성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이른바 ‘저승의 왕궁’입니다.
지붕이 있는 집과 같은 형태를 한 무덤은 파풍묘(破風墓)라 불리며, 타마우돈은 오키나와에서 가장 오래된 파풍묘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붕 위에 있는 시사는 밖의 통로 및 바깥문에서 들어오는 사람, 중문(中門)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보도록 제각각 만들어져 있습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어느 시사와 시선이 마주쳤는지 찾아봐요~!
류큐 왕국소멸 후의 드라마
1879년에 류큐국이 오키나와현으로서 일본에 속해지면서, 슈리성에서 쫓겨난 왕족은 도쿄로 이주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마지막 류큐국왕인 쇼타이(尚泰/후에 후작이 됨)가 사망한 것은 1901년으로, 그 장례식의 모습이 타마우돈의 자료 전시 코너에 전시되어 있으므로 한번 꼭 보세요. 쇼타이왕의 장남인 쇼텐(尚典)후작까지는 타마우돈에 묻혔지만, 손자인 쇼쇼(尚昌)후작(1923년 사망)의 묘는 도쿄에 있다고 합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타마우돈도 일부분 손상되었습니다. 1972년, 오키나와현의 일본 복귀와 동시에 타마우돈묘실석장(玉陵墓室石牆)이 국가지정 유형문화재 구조물에, 타마우돈 전체는 국가지정 기념물 사적(史跡)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쇼타이왕의 증손인 쇼 히로시(尚裕)씨가 사재(私財)를 들여 1974년부터 복원 공사를 3년에 걸쳐서 완성하며 1992년에 나하시에 무상으로 기증되었습니다. 그는 1996년에 사망한 후, 이세나 타마우돈에 묻혔습니다. 타마우돈은 2000년에 ‘류큐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유산군’으로써 세계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타마우돈은 왕가의 피를 잇는 분가의 후손들에 있어서 지금도 조상님의 무덤입니다. 바깥쪽 향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배례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면, 조용히 지켜보세요. 무례하게 정면을 막고 카메라를 들이 대지 말아주세요.
- 모노레일 자유승차권 제시로 관람료가 300엔에서 240엔으로 할인됩니다.
- 매표소의 호엔칸(奉円館) 전시코너에서 기초지식을 공부하고 나서 견학하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질 거예요.
- 입장은 오후5시반까지로 조금 이른 편이므로 조심하세요! 슈리성인지 이쪽인지 망설인다면, 타마우돈을 추천!
타마우돈비는 한자와 가나가 섞여져서 적혀 있기 때문에 의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번 체크해보세요^^ 또한, 정교한 석조기술은 미술품급으로, 난간의 조각이나 시사의 표정을 자세히 한번 보세요~!
- 장소명(Ja)
- 玉陵
- 주소
- 오키나와현 나하시 슈리킨죠쵸 1-3
- 주소(Ja)
- 沖縄県那覇市首里金城町1-3
- 전화번호
- 098-885-2861
- 요금
- 대인 300엔
소인 150엔*(중학생 이하)
미취학아동 무료
- 영업시간
- 9시 ~18시
- 정기휴일
- 없음
- 주차장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