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

또 하나의 오키나와를 찾는 여행 vol.2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ひめゆり平和祈念資料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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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오키나와를 찾는 여행 vol.1’에서 다뤘던 구 해군사령부호(방공호) 다음으로는 이토만시에 있는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에 한 번 들려보세요.

영화 ‘히메유리 탑’을 공개함으로써, 수많은 전적 중에서 가장 빠르게 일본 전지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15~19세의 여학생 222명, 선생님 18명으로 구성된 ‘히메유리 학도대’가 경험한 90일을 간접 체험함으로써 먼 과거가 가깝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시설입니다.

 

구 해군사령부호가 그 때 당시 그대로의 지하 벙커를 중심으로 한 전시로 구 해군 병장 관점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설명한다고 한다면,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은 학도대의 생존자와 생존자에게 계승받은 세대들이 전하는 말을 통해서 오키나와 전투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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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를 자신의 일처럼 받아 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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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현립 제일 여자고등학교의 학생 및 선생으로 구성되었던 히메유리 학도대. 히메유리라는 명칭은 제일여고의 교우회지인 「오토히메(乙姫)」와 사범학교의 교우회지인 「시라유리(白百合)」에서 유래된다.’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이 개관한 것은 1989년으로, 설립 당시부터 학도대의 생존자가 중심이 되어 무엇을 어떻게 전시할 지를 서로 의논하여 형태로 되었다고 합니다.

 

전후 60년을 앞둔 2004년에는 젊은 세대에게 전쟁의 실태를 알기 쉽게 전달되도록 전시를 전체적으로 리뉴얼 실시하여, 현재는 6개의 전시실과 다목적홀이 있고, 실제로 경험한 전 학도의 증언과 계승세대의 설명, 증언영상, 방공호와 가마(Gama)의 디오라마(축척 모형), 실물자료, 전시판넬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처럼 받아 들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과 다르지 않은 청춘이 그때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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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유리 청춘’이라 이름지어진 제1전시실은, 경험자와 방문자 사이에 있는 70년이라는 거리를 메꾸는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과 다르지 않은 꿈꾸는 나이의 여학생과 청춘시대.

나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당연하듯이 여겼던 그 때 당시의 교육.

 

“이제서야 여자들도 나라에 도움이 된다. 승리하고 있으니 1주일정도 있으면, 돌아올 수 있다. 병원에서 간호하는 것이니 누구도 죽는 일은 없은 것이다.”

그 당시 17세였던 관장인 시마부쿠로 요시코(島袋淑子)씨가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임으로써 학도대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을 기뻐했었고,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당황하는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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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제2전시실은 ‘히메유리 전장’으로, 하에바루(南風原)의 오키나와 육군병원호(壕)에서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어제 일처럼 전해집니다.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출혈과다로 죽어가는 모습을 단지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는 시마부쿠로씨.

 

병사가 죽을 때는 ‘천황폐하만세’라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는 학도대의 다른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처음 간호한 군인 아저씨의 마지막 말은 가족의 이름이었습니다.

‘왜일까’하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도 대부분의 군인들이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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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유리 학도대의 생존자의 증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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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에 퇴각 명령을 받고 움직이지 못했던 학우 2명을 남겨두고, 남부로 이동한 학도대는, 6월 18일 ‘해산 명령’으로 포탄이 난비하는 전장에 글자 그대로 버려진 지옥과 같은 날들…

‘해산 명령과 죽음의 방황’이라 지어진 제3전시실에서는 미군이 촬영한 필름과 생존자의 증언 영상을 대형 스크린에 비춰서 그 때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그 시절, 그 장소에 태어났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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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료관 안에서 가장 존재감이 있는 제4전시실 ‘진혼(鎮魂)’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여학생과 선생님을 애도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벽면에 걸린 200여장의 영정과 생존자의 증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증거이며, 영정과 같이 붙어 있는 각각의 인품을 적은 소개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읽고 나서 다시 영정을 보면, 죽은 학도대의 모두가 마치 자신들의 친구와 같은 가까운 존재로 느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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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전시실 「회상(回想)」에서 감상을 적는 20대 여성’

 

‘언젠가 전해줄 수 없는 날이 오겠죠..’

2000년때부터 생존자들을 대신해서 경험을 전해주는 후계자 육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는 자료관의 설명원과 학예원이 평화 강의 등을 물려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은 전쟁의 실상를 알기 위한 입구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계기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연령대로는 방문자에 가까운 계승세대 직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날마다 찾고 있다고 합니다.

전달되는 차례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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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찾고 있었어. 어디에 갔다왔어?” 라고 물으면, 오래된 친구는 아무말도 없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죠.’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이 생길 때까지, 자기만이 살아 남아 버렸다는 죄의식을 계속 끌어 앉고 있었다는 시마부쿠로 요시코 관장님.

 

“어디까지나 전쟁은 안되요.”

“어느 순간 갑자기 전쟁이 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나 자신은 관계없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부터 관련되어 있는 그게 전쟁입니다.”

“‘외국이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하지?’ 라고 질문받은 적이 있지만, 전쟁이 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하세요.”

학도대의 생존자가 말하는 말은 전부 마음을 묵직하게 울립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시마부쿠로 관장님 같은 생존자 분이 말해주시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말하는 것과는 받아 들이는 방법이 다르네요.”

학예원인 마에도마리 카츠미(前泊克美)씨는 건내 받은 차례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수학여행으로 방문했던 고등학생이 교사가 되어 다시 방문했다고 하는 에피소드를 말해 줄 때의 표정은 매우 밝았습니다.

내 안의 변화에 눈뜨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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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유리 탑은 종전의 다음해에 처음으로 건립된 혼백의 탑(魂魄之塔)에 이어서 2번째로 지어진 위령탑(慰霊の塔). 같은 시기에 지어진 오키나와 사범건아의 탑(沖縄師範健児之塔)과 나란히 평화를 희망하는 3대 위령탑입니다.

 

일본에서는 수학여행에서 한번 들린 적이 있다고 하는 분도 적지 않게 있을 겁니다.

10대 때에 느꼈던 것이 세월과 함께 어떻게 변했는지.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고 느끼는게 어떻게 변했는지.

내 안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 한번 들려 보러 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알아두면 유용한 정보
  • 히메유리 탑의 뒤쪽은 조그마한 숲 속에 보드 워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자료관을 나온 후에 느꼈던 것을 되돌아 볼 때에 좋은 장소입니다.
  • 20명 이상이 이용할 경우, 단체요금으로 적용됩니다.
    ●단체요금
    [대인] 280엔
    [소인] 190엔
    [초•중학생] 100엔
    *인솔자는 무료
글쓴이 추천

자료관과 함께 다음과 같은 장소를 방문해 보시면, 보다 한층 학도대들이 가깝게 느껴질 거예요.
1) 오키나와 시범학교 여자부와 현립 제일고등여자학교가 있었던 아사토 십자로와 나하시 다이도(大道)의 다이도 초등학교 근처.
2) 최초의 배치장소인 하에바루쵸(南風原町)의 오키나와 육군병원호(HP)
3) 자료관 근처에 있는 이하라 제일 외과호(伊原第一外科壕)와 아라사키 해안(荒崎海岸)
또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이 된 여학도대는 이밖에도 즈이센 학도대(瑞泉学徒隊), 시라우메 학도대(白梅学徒隊), 데이고 학도대(梯梧学徒隊), 후지 학도대(ふじ学徒隊), 나고란 학도대(なごらん学徒隊)가 있습니다. 히메유리 학도대 외에도 계승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한 번쯤 꼭 체크해 보세요. 후지 학도대는 코이케 대장의 “반드시 살아남아라.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라.”라는 훈시로 인해 오키나와 전투 시점의 사망자는 2명뿐이었습니다. 장소도 달랐던 것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리더에 의해 대원의 인생이 크게 좌우된 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